디지털 제품 여권(DPP)이란?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DPP)은 하나의 제품에 대한 원자재 조달부터 생산, 사용, 폐기·재활용까지 전 생애주기 정보를 디지털로 묶어 두고, 제품에 부착된 QR코드나 바코드 같은 데이터 캐리어로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쉽게 말하면 제품마다 발급되는 "디지털 이력서"입니다. 소비자는 케어라벨의 QR코드를 찍어 탄소발자국, 재활용 소재 비율, 수리·재활용 방법 같은 정보를 바로 확인할 수 있고, 규제 당국과 재활용 업체는 같은 데이터를 검증 목적으로 활용합니다.
왜 지금 떴나
DPP가 갑자기 주목받는 이유는 "권고"가 아니라 EU의 강제 규제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EU는 2024년 7월 발효한 지속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 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을 통해 DPP의 법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지속가능성 검증의 단위가 "기업"이었다면, ESPR은 그 단위를 "개별 제품"으로 끌어내립니다. 즉 한 점 한 점이 자기 데이터를 증명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적용되는 신호탄은 배터리입니다. EU 배터리 규정(EU 2023/1542)에 따라 2027년 2월 18일부터 EU 시장에 출시되는 용량 2kWh 초과 산업용·전기차(EV) 배터리는 배터리 여권을 의무적으로 갖춰야 합니다. 이 여권에는 성능·수명 데이터, 제조 정보, 코발트·리튬 등 원료 출처를 포함한 소재 구성, 폐기 처리 지침이 담깁니다. 배터리 규정은 사실상 전체 DPP 제도의 시험대 역할을 하고, 여기서 정해진 데이터 표준과 집행 방식이 다른 품목으로 확장됩니다.
핵심 일정과 적용 품목
ESPR 작업계획상 우선 적용 품목군은 ①섬유(의류·신발) ②철강 ③알루미늄 ④가구·매트리스 ⑤타이어 ⑥세제 ⑦페인트 ⑧윤활유 ⑨화학물질 ⑩정보통신기술(ICT) 등 10개입니다. 각 품목은 별도의 위임법(delegated act)으로 세부 의무가 확정되는데, 섬유 위임법은 2027년 채택이 유력하고 발표 후 약 18개월의 준비 기간이 주어질 전망입니다.
여기서 한국 브랜드가 놓치기 쉬운 지점이 있습니다. ESPR은 생산 시설 위치와 무관하게 "EU 27개 회원국 내에서 판매되는 제품"에 적용됩니다. 즉 한국에서 만들어 EU로 수출하는 의류·배터리·전자제품 모두 직접 대상입니다. DPP를 부착하지 않은 제품은 과징금이나 시장 퇴출 같은 제재를 받을 수 있어, 사실상 EU 시장 진입의 통과 조건이 됩니다.
브랜드를 바꾸는 방식
DPP의 진짜 변화는 데이터 공급망에 있습니다. 그동안 1회성 보고서로 끝나던 지속가능성 정보가, 제품 단위로 상시 검증 가능한 데이터로 바뀝니다. 이를 위해 브랜드는 자기 공급망의 협력사 데이터까지 표준 형식으로 수집·연결해야 하므로, DPP는 마케팅 라벨이 아니라 데이터 인프라 과제가 됩니다. 실제로 EU는 CIRPASS-2 프로젝트로 상호운용 표준을 만들고 있고, Circularise·EON·Kezzler 같은 전용 플랫폼이 이 표준에 맞춰 솔루션을 내놓고 있습니다.